같은 장면에서 또 싸우지 않도록 정하는 약속들
고3 집의 다툼을 들여다보면 신기하게도 매번 비슷한 장면에서 터져요. 밤늦게 휴대폰을 보는 걸 들켰을 때, 성적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학원 끝나고 늦게 들어왔을 때. 같은 장면에서 같은 말이 오가고, 같은 식으로 문이 닫혀요. 그렇다면 해결도 그 장면에 미리 규칙을 놓아 두는 데서 시작할 수 있어요.
규칙이라고 해서 아이를 묶어 두자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부모가 지킬 규칙이 더 많아요. 다툼의 상당수는 아이의 행동보다 부모가 언제, 어떻게 말을 꺼내느냐에서 생기거든요. 몇 가지 장면별로 나눠서 이야기해 볼게요.
성적 이야기는 정해진 날에만 해요
많은 집에서 가장 자주 부딪히는 주제는 성적이에요. 아이가 지나가다 한숨만 쉬어도 "시험 망쳤어?"가 나오고, 그 말이 싸움의 시작이 되죠. 그래서 성적 이야기를 하는 날을 정해 두길 권해요.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온 주말 하루, 혹은 한 달에 한 번처럼요. 그날은 아이가 먼저 성적표를 가져와서 함께 보고, 그 외의 날에는 부모가 먼저 성적을 묻지 않는 거예요. 부모가 이 약속을 지키면 아이도 그날만큼은 피하지 않고 앉아요.
늦는 날은 연락만 하면 묻지 않아요
고3은 학교, 학원, 독서실을 오가느라 귀가 시간이 들쑥날쑥해요. 늦게 들어온 아이에게 "어디 있었어?"부터 물으면 아이는 추궁당한다고 느끼죠. 이 장면에는 간단한 규칙 하나면 돼요. 정해진 시간보다 늦어지면 아이가 미리 짧게 연락하고, 연락을 받은 부모는 들어왔을 때 이유를 따지지 않는 거예요. 서로 지킬 것이 하나씩 있으니 공평하다고 느끼고, 실제로 잘 지켜집니다.
밥 문제도 의외로 자주 부딪히는 지점이에요. 부모는 정성껏 차렸는데 아이는 시간이 없다며 몇 숟가락만 뜨고 일어나거나, 아예 먹지 않고 나가죠. 부모 입장에서는 서운하고, 아이 입장에서는 "먹어라" 소리가 또 하나의 잔소리예요. 이럴 땐 아이에게 언제, 무엇을 먹는 게 편한지 물어서 정해 두면 좋아요. 아침엔 들고 갈 수 있는 간단한 것, 저녁엔 늦게 와도 데워 먹을 수 있는 것처럼요. 아이 일정에 식사를 맞추면 밥상 앞의 다툼이 눈에 띄게 줄어요.
휴대폰은 뺏는 대신 자리를 정해요
휴대폰은 고3 집의 단골 전쟁터예요. 무작정 뺏으면 아이는 몰래 숨기고, 숨긴 걸 찾으면 더 큰 싸움이 나요. 그래서 시간이 아니라 장소로 정하는 쪽이 덜 부딪혀요. 공부할 때는 거실 충전대에 두고, 잠잘 때는 방 밖에 두는 식이요. 아이와 함께 정하고, 부모도 저녁 시간에는 휴대폰을 같은 자리에 두면 아이가 받아들이기 훨씬 쉬워요.
화가 날 때는 그 자리에서 결론 내지 않아요
규칙이 있어도 다툼은 생겨요. 그럴 때를 위한 규칙도 하나 있으면 좋아요. 서로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면 누구든 "지금은 그만하고 내일 이야기하자"라고 말할 수 있고, 그 말이 나오면 둘 다 멈추는 거예요. 화가 난 상태에서 나온 결론은 대개 후회로 남아요. 하룻밤 지나고 다시 앉으면 생각보다 금방 풀리는 일이 많습니다.
다음 날 다시 앉을 때는 부모가 먼저 말을 꺼내 주세요. 고3 아이는 자존심 때문에 먼저 다가오기 어려워해요. "어제 엄마가 목소리가 너무 컸지" 하고 시작하면, 아이도 "나도 좀 심했어"라고 따라오는 경우가 많아요. 누가 옳았는지 가리려 하지 말고, 같은 장면이 다시 오면 어떻게 할지만 정하면 돼요. 그러면 그 다툼도 새로운 규칙 하나로 남아요.
일주일에 한 번은 입시 없는 시간을 둬요
마지막 규칙은 즐거운 쪽이에요. 일주일에 한 번, 짧게라도 공부와 입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시간을 정해 두는 거예요. 일요일 저녁 외식이든, 같이 보는 예능 프로그램 하나든 괜찮아요. 이 시간이 있으면 나머지 엿새 동안의 잔소리도 조금은 덜 아프게 들려요. 아이도 부모도 숨 돌릴 자리가 생기거든요.
규칙을 한꺼번에 다 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번 주에 가장 많이 다툰 장면 하나를 떠올려 보시고, 그 장면에 놓을 규칙 하나만 아이와 함께 정해 보세요. 종이에 적어 냉장고에 붙여 두면 다음에 같은 장면이 왔을 때 둘 다 그 종이를 먼저 보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