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특에 '모델링'이라고만 쓰면 충분할까요?
학년 말에 수학 세특을 한 반씩 넘겨 보면 같은 단어가 자꾸 눈에 걸려요. 수학적 모델링. 감염병 확산을 모델링했다는 아이, 버스 배차 간격을 모델링했다는 아이, 아이스크림 판매량을 모델링했다는 아이. 주제는 제각각인데 문장을 다 읽고 나면 묘하게 같은 글을 세 번 읽은 기분이 들어요.
그러니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라는 쪽에 가까워요. 이 단어는 이제 너무 많이 쓰여서,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해요. 오히려 단어만 있고 내용이 비어 있으면, 읽는 사람은 "요즘 유행하는 말을 넣었구나" 하고 지나갑니다. 다만 모델링 활동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니에요. 어떻게 기록되느냐가 갈림길이에요.
모델링이라는 말에는 원래 순서가 들어 있어요
모델링은 현실의 복잡한 일을 수학으로 옮기는 과정이에요. 그런데 현실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으니까, 반드시 무언가를 버려야 해요. 매점 줄이 얼마나 길어질지 식으로 만들고 싶다면, 학생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온다고 가정할지, 쉬는 시간 시작 직후에 몰린다고 볼지부터 정해야 하죠. 그 선택이 곧 모델이에요.
그래서 모델링을 제대로 한 학생의 기록에는 대개 세 가지가 남아요. 무엇을 단순하게 가정했는지, 만든 식이 실제 자료와 얼마나 맞았는지, 맞지 않았을 때 무엇을 바꿨는지. 이 중 하나도 없이 "~을 수학적으로 모델링하여 분석함"으로 끝나면, 사실상 공식 하나에 숫자를 넣어 본 활동과 구별이 안 돼요.
같은 주제, 다른 두 문장
예를 들어 두 학생이 똑같이 스마트폰 배터리가 줄어드는 모습을 다뤘다고 해 볼게요. 한 기록은 이렇게 쓰여 있어요. 배터리 잔량 변화를 일차함수로 모델링하여 사용 가능 시간을 예측함. 틀린 말은 없지만 더 읽을 것도 없죠.
다른 기록은 조금 달라요. 처음에는 잔량이 일정하게 준다고 보고 일차함수를 세웠지만, 직접 기록한 자료에서 잔량이 낮아질수록 감소 속도가 달라지는 구간을 발견함. 화면 밝기와 실행 앱을 고정하지 않은 점을 오차 원인으로 짚고, 조건을 통제해 다시 측정함. 이 문장을 읽으면 학생이 어디서 멈칫했고 무엇을 고쳤는지가 보여요. 모델링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안 나와도 이쪽이 훨씬 모델링다운 기록이에요.
두 기록의 차이는 학생의 수학 실력보다 기록할 거리가 있었느냐에서 나와요. 첫 번째 학생도 사실 그래프가 어긋나는 걸 봤을지 몰라요. 다만 그걸 대수롭지 않게 넘겼거나, 보고서에 적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요. 선생님은 학생이 남긴 것 이상을 쓸 수 없어요. 아무리 열심히 했어도 보고서와 발표에 흔적이 없으면 세특에는 결국 무난한 한 줄만 남습니다.
학생이 남겨야 할 건 단어가 아니라 흔적이에요
고2라면 탐구를 하면서 노트 한쪽에 작은 칸을 하나 만들어 두세요. 내가 세운 가정, 버린 조건, 처음 식이 틀린 지점. 세 줄이면 충분해요. 이 메모가 있으면 보고서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선생님이 세특을 쓰실 때도 붙잡을 문장이 생겨요.
그리고 너무 거창한 주제를 고르지 않아도 돼요. 국가 단위 인구 예측보다 우리 학교 급식 잔반량처럼 직접 자료를 모을 수 있는 주제가 오히려 고칠 거리를 많이 줍니다. 자료를 손으로 만져 봐야 식이 어긋나는 순간을 만나고, 그 순간이 기록이 돼요.
배운 단원과 연결하는 것도 잊지 마세요. 지수함수를 배운 뒤라면 왜 이 현상에 지수함수가 어울리는지, 혹은 왜 어울리지 않는지를 따져 보는 게 좋아요. 아직 배우지 않은 고급 수학을 끌어오는 것보다, 지금 배우는 식으로 현실을 설명하려다 부딪힌 한계를 솔직하게 적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어요. 그 한계가 다음 학기 탐구 주제가 되기도 하고요.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작은 제안
세특을 쓰는 입장에서도 이 단어는 편한 도구예요. 활동을 한마디로 묶어 주니까요. 그래도 한 번쯤은 이 단어를 지우고 문장을 다시 써 보시길 권해요. 단어를 빼도 무슨 활동이었는지 설명이 되면 그 기록은 살아 있는 거고, 설명이 안 되면 학생에게 무엇을 가정했는지 한 번 더 물어볼 때예요. 학생이 내는 보고서 양식에 가정과 수정 과정을 적는 칸을 미리 넣어 두면, 학년 말에 쓸 거리가 훨씬 풍성해집니다.
키워드보다 오래 남는 것
입시에서 유행어는 몇 년 주기로 바뀌어요. 지금은 모델링이고, 조금 지나면 또 다른 말이 그 자리를 차지하겠죠. 그런데 가정을 세우고 틀린 걸 고친 과정은 어떤 단어로 묶이든 같은 힘을 가져요. 오늘 풀던 탐구 노트를 열어서, 내가 처음에 무엇을 당연하게 여겼는지 한 줄만 적어 보세요. 그 한 줄이 키워드 열 개보다 오래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