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펜으로 칠한 지문이 머릿속엔 하나도 안 남아요
고1 학생의 모의고사 시험지를 펴 보면 독서 지문이 온통 형광색인 경우가 많아요. 중요해 보이는 곳마다 줄을 긋다 보니 결국 거의 모든 문장에 줄이 그어져 있죠. 그 시험지를 들고 "이 지문이 무슨 얘기였어?" 하고 물으면 대답이 잘 안 나와요. 열심히 읽은 건 분명한데 머릿속에 남은 건 별로 없는 거예요.
이럴 때 제가 권하는 건 아주 수수한 방법이에요. 문단 하나를 다 읽으면 여백에 한 줄로 그 문단의 내용을 적는 것. 그게 전부예요.
밑줄은 고르는 일, 요약은 버리는 일이에요
밑줄을 긋는 건 중요한 걸 고르는 작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판단을 뒤로 미루는 경우가 많아요. 일단 그어 두고 나중에 보자는 거죠. 시험장에서는 그 나중이 오지 않아요.
한 줄 요약은 반대예요. 문단 안의 문장 다섯 개 중 네 개를 버려야 한 줄이 나와요. 무엇을 버릴지 정하려면 그 문단이 결국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야 하고, 그걸 아는 순간이 바로 이해한 순간이에요. 요약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 문단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는 신호이기도 해요. 그 신호를 시험 전에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게 이 방법의 가장 큰 장점이에요.
처음엔 느려져도 괜찮아요
이 연습을 시작하면 처음 몇 주는 지문 하나에 시간이 꽤 걸려요. 고1 학생들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이러다 시간 안에 못 풀어요"예요. 맞아요, 연습 기간에는 느려져요. 그래서 시험 때가 아니라 평소 공부할 때 하는 거예요.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보조 바퀴를 다는 것과 비슷해요. 몇 주 동안 손으로 적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적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문단이 끝날 때마다 한 줄이 저절로 떠올라요. 그때부터는 실전에서 적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이전보다 빨리 읽게 돼요. 다시 읽을 일이 줄어드니까요.
좋은 한 줄은 이렇게 생겼어요
한 줄 요약을 처음 하면 문단의 첫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는 학생이 많아요. 그런데 첫 문장이 늘 중심 문장인 건 아니에요. 질문을 던지거나 배경을 깔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에 하는 문단도 흔하거든요.
좋은 한 줄에는 대개 주어와 그 주어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요. "광합성은 빛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바꾼다"처럼요. "광합성 설명" 같은 제목형 요약은 피하는 게 좋아요. 무엇에 대한 문단인지만 적고 무슨 말을 했는지는 빠져 있으니까요. 또 문단 사이의 관계가 보이면 그걸 함께 적어 두세요. "앞의 이론의 한계", "2문단 개념의 사례"처럼 짧게 붙여 두면 나중에 지문 전체 구조가 한눈에 들어와요.
다 적은 다음에는 요약만 보고 지문을 설명해 보세요
한 줄 요약 다섯 개가 모였다면, 지문을 덮고 그 다섯 줄만 보며 이 글이 어떤 흐름으로 흘러갔는지 소리 내어 말해 보세요. 혼자 해도 되고 가족에게 해도 돼요. 설명이 매끄럽게 이어지면 요약이 잘된 거고, 중간에 "그래서 왜 이렇게 됐지?" 하고 막히면 그 사이 문단을 다시 읽어 볼 차례예요.
이 과정을 몇 번 해 보면 문제를 풀 때 선지가 달리 보여요. 선지 하나를 읽으면서 이게 몇 번째 문단 얘기인지 바로 떠오르거든요. 지문을 처음부터 다시 훑지 않아도 돼요. 독서에서 시간을 가장 많이 잡아먹는 건 읽는 속도가 아니라 되돌아가는 횟수라는 걸 그때 몸으로 알게 될 거예요.
한 가지 더 해 볼 만한 게 있어요. 다섯 줄 요약을 다시 한 줄로 줄여 보는 거예요. 지문 전체가 결국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한 문장으로 적어 보면, 그 문장이 대개 지문의 주제이자 첫 번째 문제의 답과 아주 가까워요. 처음엔 이 한 문장이 잘 안 나와요. 다섯 줄 사이에서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곁가지인지 아직 구분이 안 되기 때문이에요. 이 구분이 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지문이 덩어리째 보이기 시작합니다.
고1이라서 할 수 있는 연습이에요
고3이 되면 이런 기초 연습을 할 여유가 잘 나지 않아요. 문제 수를 채우기 바쁘거든요. 고1 때는 지문 하나를 붙들고 천천히 뜯어볼 시간이 있어요. 이 시기에 만든 읽기 습관이 고2, 고3까지 그대로 따라가요.
오늘 밤에는 교과서든 모의고사든 비문학 지문 딱 하나만 골라 보세요. 문단이 끝날 때마다 연필로 한 줄. 형광펜은 오늘 하루만 필통에 넣어 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