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에서 하나도 안 나왔다는 말을 믿어도 될까요
수능이 끝나면 해마다 비슷한 말이 돌아요. "EBS에서 나온 게 하나도 없었어." 그 말을 들은 다음 해 고3 중 몇몇은 봄부터 EBS 교재를 사지 않아요. 기출과 사설 문제집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가을쯤 되면 그중 일부가 조용히 EBS 교재를 사러 서점에 가요.
체감이 낮은 건 사실이에요. 지금 수능의 EBS 연계는 지문을 그대로 가져오는 방식이 아니라, 같은 개념이나 소재를 다른 글로 다시 써서 내는 간접 연계가 중심이거든요. 똑같은 문장을 만날 일이 거의 없으니 "안 나왔다"는 느낌이 드는 게 자연스러워요. 그런데 체감이 낮다는 것과 도움이 안 된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예요.
독서 연계는 소재가 낯설지 않게 해 줘요
독서 영역에서 EBS가 주는 건 정답이 아니라 낯익음이에요. EBS 교재에서 어떤 철학자의 인식론이나 어떤 기술의 작동 원리를 한 번 읽어 본 학생은, 수능에서 같은 소재가 전혀 다른 글로 나와도 첫 문단에서 덜 당황해요.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한 번 인사해 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의 차이라고 하면 비슷할 거예요.
시험장에서 첫 문단의 당황은 생각보다 비싸요. 낯선 소재 앞에서 머리가 굳으면 같은 문장을 두세 번 읽게 되고, 그 몇십 초가 쌓여서 마지막 지문을 못 푸는 일이 생기거든요. EBS로 쌓은 낯익음은 이 몇십 초를 아껴 주는 보험 같은 거예요.
문학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요
문학은 독서보다 연계를 체감하기 쉬운 편이에요. EBS 교재에 실린 작품이 수능에 다시 나오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다만 같은 작품이라도 교재에 실린 부분과 수능에 나온 부분이 다를 수 있어요. 교재에서 앞부분을 읽었는데 시험에서는 뒷부분이 나오는 식이죠.
그래서 문학 EBS는 실린 부분만 외우기보다 작품 전체의 흐름을 함께 잡아 두는 게 좋아요. 소설이라면 주요 인물이 누구이고 어떤 갈등이 어떻게 풀리는지, 시라면 화자가 처한 상황과 정서가 무엇인지 정도요. 이 뼈대가 있으면 처음 보는 대목이 나와도 "아, 이 장면은 그 갈등이 터지기 직전이구나" 하고 자리를 찾을 수 있어요.
EBS를 기출처럼 풀면 아까워요
많은 학생이 EBS 교재를 문제집처럼 풀어요. 지문 읽고, 문제 풀고, 채점하고, 넘어가고. 그런데 EBS 문제는 평가원 기출만큼 정교하게 다듬어진 문제가 아니에요. 선지가 조금 거칠거나 근거가 애매한 문제도 섞여 있어요. 그런 문제에서 틀렸다고 너무 오래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어요.
EBS에서 얻어 가야 할 건 문제 풀이 감각보다 지문과 작품 자체예요. 그러니 문제를 다 풀었다면 지문으로 돌아가 이 글이 어떤 개념을 다루는지, 그 개념의 핵심 구조가 무엇인지를 짧게 적어 두세요. 수능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는 건 문제가 아니라 그 개념이니까요.
시간이 부족하면 무엇을 남길까요
고3 가을은 모든 게 부족한 시기예요. EBS 교재 두세 권을 다 볼 시간이 없다면, 저는 문학 작품 목록 정리를 먼저 권해요. 교재에 실린 현대시, 고전시가, 소설 작품 이름을 쭉 적어 놓고, 각 작품 옆에 한두 줄로 핵심을 정리해 보는 거예요. 낯선 작품이 나올 확률을 줄여 주는 가장 가성비 좋은 방법이에요.
독서는 교재의 모든 지문을 풀기보다 목차를 보며 소재만 훑어보는 것도 방법이에요. 각 지문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첫 문단과 마지막 문단만 읽어도 소재에 대한 낯익음은 어느 정도 생겨요. 기출 분석에 쓸 시간을 지키면서 EBS의 이점도 챙기는 절충안이죠.
친구들과 나눠 보는 것도 방법이에요. 각자 교재의 한 단원씩 맡아서 작품이나 지문의 핵심을 짧게 정리하고, 쉬는 시간에 돌려 보는 식으로요. 남에게 설명하려고 정리하다 보면 내가 맡은 부분은 오히려 더 깊이 남아요. 혼자 다 하려다 지치는 것보다 훨씬 오래 갑니다.
EBS를 버리는 학생과 쓰는 학생의 차이
수능 날 시험지를 넘겼을 때 아는 작품이 하나라도 보이면 마음이 놓여요. 그 작은 안도감이 다음 지문으로 넘어갈 힘이 돼요. 반대로 모든 작품이 처음 보는 것들이면 같은 실력이라도 손이 굳기 쉬워요. EBS가 해 주는 건 점수 몇 점이라기보다 그 순간의 평정심에 가까워요.
오늘은 지금 가지고 있는 EBS 문학 교재를 펴서 목차에 있는 작품 중 제목만 보고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 작품에 동그라미를 쳐 보세요. 그 동그라미 수가 이번 주에 챙겨야 할 작품 수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