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까지 숙제하는 아이의 성적이 제자리인 까닭
밤 11시, 아이 방 불이 아직 켜져 있어요. 학원 숙제가 많대요. 문제집 몇 쪽, 프린트 몇 장. 부모님은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시죠. 이렇게 열심히 하니까 성적은 오르겠지 하고요. 그런데 시험이 끝나면 성적표의 숫자는 지난번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이렇게 성실한 아이에게 무엇이 부족한 걸까요.
상담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숙제를 어떻게 하는지 먼저 여쭤봐요. 대부분의 경우 문제는 숙제의 양이 아니라, 숙제를 하는 방식에 숨어 있어요. 아이는 숙제를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정작 실력이 쌓이는 부분을 건너뛰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끝내는 것이 목표가 되면 생기는 일
숙제 양이 많으면 아이에게 가장 급한 건 시간 안에 끝내는 거예요. 학원에서 숙제 검사를 하니까 빈칸이 있으면 안 되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요령이 생겨요. 막히는 문제는 해설을 보고 풀이를 옮겨 적고, 비슷한 문제는 앞 문제의 풀이를 그대로 따라 해요.
이렇게 하면 숙제는 끝나요. 빈칸 없이 깔끔하게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아이가 혼자 생각한 시간은 거의 없어요. 수학 실력은 막힌 문제 앞에서 혼자 고민하는 시간에 늘어나는데, 숙제의 양이 그 시간을 밀어내 버린 거예요. 밤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있었지만 실력이 쌓인 시간은 생각보다 짧아요. 게다가 늦게까지 숙제를 하느라 잠이 줄면 다음 날 수업 집중력도 떨어져요. 열심히 할수록 오히려 손해가 쌓이는 이상한 고리가 생기는 거예요.
숙제 노트를 한번 넘겨 보세요
집에서 확인할 방법이 있어요. 아이의 숙제 노트나 문제집을 한번 넘겨 보세요. 수학을 잘 모르셔도 괜찮아요. 몇 가지만 보시면 돼요.
풀이가 너무 깔끔하지 않은지 보세요. 혼자 고민한 흔적이 있는 숙제는 지운 자국, 그어 버린 식, 여백의 계산이 남아 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한 번에 쓴 풀이가 계속 이어진다면 해설을 보고 옮겼을 가능성이 있어요. 채점 표시도 보세요. 스스로 채점했는지, 틀린 문제를 다시 풀었는지요. 틀린 문제에 빨간 줄만 있고 다시 푼 흔적이 없다면, 그 문제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지나간 거예요.
해설을 본 문제와 혼자 푼 문제를 구별하게 해 주세요
해설을 보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에요. 정말 모르는 문제는 해설을 보고 배워야 하죠. 문제는 해설을 본 문제와 혼자 푼 문제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둘 다 숙제 노트에는 똑같이 풀린 문제로 남으니까요.
그래서 아이와 약속을 하나 해 보세요. 해설을 보고 푼 문제에는 작게 별표를 해 두기로요. 별표는 부끄러운 표시가 아니라, 다시 풀어야 할 문제라는 표시예요. 일주일에 한 번, 별표 친 문제만 모아서 해설 없이 다시 풀어 보는 시간을 만들면 돼요. 이 시간이 바로 숙제가 실력으로 바뀌는 시간이에요.
양이 너무 많다면 학원과 이야기해 보세요
숙제 양 자체가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라면, 학원과 직접 이야기해 보시는 것도 방법이에요. 많은 학원이 반 전체에 같은 양의 숙제를 내요. 그런데 아이마다 문제를 푸는 속도와 고민하는 시간이 다르니, 같은 양이 누군가에게는 적당하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많을 수 있어요.
"아이가 숙제를 끝내느라 혼자 고민할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솔직하게 말씀드려 보세요. 숙제 양을 조정해 주거나, 어떤 문제를 우선으로 할지 알려 주는 학원도 있어요. 양을 줄이는 대신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 오게 하는 식으로 바꿔 주기도 하고요. 아이 상황을 가장 잘 아는 건 부모님이니, 학원과의 대화에서 부모님 목소리가 꼭 필요해요.
숙제 말고 아이만의 시간을 남겨 주세요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실 게 있어요. 아이의 하루에서 학원 숙제 말고 스스로 공부를 정하는 시간이 있는지요. 학교 수업 복습, 틀린 문제 다시 풀기, 시험 범위 정리 같은 건 학원 숙제에 들어가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성적을 올리는 데는 이런 시간이 꼭 필요해요.
학원 숙제만으로 하루가 꽉 차 있다면, 숙제가 아이의 공부를 대신하고 있는 셈이에요. 일주일에 몇 시간이라도 아이가 스스로 무엇을 할지 정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세요.
오늘 밤, 숙제를 마친 아이에게 "오늘 숙제 중에 혼자 끝까지 고민한 문제가 몇 개였어?" 하고 물어봐 주세요. 그 숫자가 숙제의 양보다 다음 성적표를 더 정확하게 예고해 줄 거예요.